대한민국 군대를 근본부터 흔들어 놓은 하나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나회의 시초 5 성회
하나회는 육군사관학교 11기 출신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박병하, 최성택으로 구성된 친목 조직 5 성회로 시작이었습니다.
노태우의 말에 의하면 5 성회는 육사 내에서도 우러러보는 엘리트 집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적도 좋지 않고 운동에만 빠져있는 소위 꼴통들이었습니다. 초기 5 성회였던 웅성 박병하는 중간에 유급당해 이름이 빠졌습니다.
5 성회는 스스로를 별로 지칭한 별명도 직접 지어 붙였습니다. 용성 전두환, 관성 노태우, 여성 김복동, 혜성 최성택, 웅성 박병하 이렇게 5개의 별이 모여 오성회라 자칭하며 다녔습니다.
소수의 육사생도로 이루어졌던 친목모임은 점점 규모가 커집니다. 최초 오성회에서 박성하가 빠지고 권익현, 손영길, 정호용, 노정기, 백운택, 박갑룡 이렇게 6명이 들어와 10인회가 되었다는 말이 있고 박병하가 빠지고 권익현 손영길 정호용가 추가되어 칠성회라고 하는 말도 있는데 주류는 칠성회입니다.
그들은 최초의 정규 육사 4년제 과정 출신이라는 점에서 엘리트 의식이 강했습니다. 짧은 기간의 교육을 받은 선배들이 군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 기수보다 교육을 많이 받은 자신들의 진급이 늦는 것에 못마땅해했습니다.
박정희의 비호
5.16 당시 ROTC교관으로 근무하던 전두환은 5월 16일 아침 소식을 듣게 되고 늦게라도 5.16에 합류하기 위해 육사생도와 졸업생들을 동원해 5.16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이게 했고 이 행동으로 박정희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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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행진으로 박정희에게 인정받은 전두환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민원비서관, 중앙정보부인사과장 등의 좋은 보직에서 일했고 1963년 박정희는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습니다.
전두환은 박정희에게 군에서 박정희를 지지하는 육사출신 사모임의 필요성을 건의하며 자신들의 모임을 소개합니다.
박정희는 5.16을 함께하며 커져버린 육사 8기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육사 11기 세력을 비호해 주게 됩니다.
박정희는 하나회에 보직과 진급의 혜택을 주었고 측근이던 박종규와 윤필용에게도 육사 11기를 지원하도록 지시합니다.
하나회의 탄생
전두환은 1963년부터 군부 내 비밀 사조직 하나회의 결성을 비밀리에 진행합니다. 전두환, 김복동, 노태우 등 육사 11기가 리더그룹으로 가입한 뒤 태양을 위해고, 조국을 위하는, 하나같은 마음이라는 뜻으로 조직의 이름을 하나회로 정합니다.
후배들을 선발할 때에는 영남출신, 충성심,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기준으로 선발했고 각 기수당 인원은 10명 정도로 했습니다.
한 명이 각 기수에서 선발되면 육사 11기 전원이 동의해야 입회할 수 있었고 입회한 후배들은 포섭책이 되어 동기들을 엄선해 보고했으며 엄선된 후배들 역시 같은 과정을 거친 뒤에야 입회할 수 있었습니다.
물망에 오른 후배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졸업성적 교우관계 건강 부인의 사생활까지 심사를 거쳐야 했고 진급과 보직에서의 특혜를 받을 수 있는 하나회의 가입을 권유받은 사람들은 최고의 영예로 생각했습니다.
까다로운 선발 작업으로 1년 반정도가 지나 하나회는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1964년 3월 1일 김복동의 집에서 결성식을 갖게 됩니다.
하나회는 선후배 간에 합의된 명령에 절대복종한다. 하나회원 상호 간에 경쟁하지 않는다. 이를 위반할 시 '인격말살'을 감수한다.라는 강령아래 200명이 넘는 군부 내 사조직으로 성장합니다.
후배들은 선배를 부를 때 형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으며 점조직으로 연결되어 있어 리더그룹인 육사 11기 외에는 회원들 간에는 서로 정체를 모르고 지냈다고 합니다.
하나회가 결성되고 하나회의 수장이었던 전두환은 동기들 중 가장 늦게 소령으로 진급했지만 육사 11기 중 가장 먼저 대령으로 승진합니다. 1973년 동기들 중 가장 먼저 준장으로 진급합니다.
박정희는 전두환을 청와대로 초대해 일심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지휘봉과 함께 크라운 자동차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전두환은 윤필용과 강창성 등 군에서 영향력 있는 선배들을 찾아가 형님 형님 하며 용돈을 받은 뒤 후배들에게 술을 사주었고 하나회 후배들의 진급과 보직청탁을 하고 다녔습니다.
하나회의 회원들은 수경사 보안사 특전사 대통령경호실 등에서 근무했고 해외파견등의 여러 특혜를 누렸습니다.
하나회의 위기
1973년 발생한 윤필용 사건으로 하나회가 주목받게 됩니다. 1972년 당시 수경 사령관으로 복무하던 윤필용 소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장 직무 대리직까지 맡았을 정도로 박정희 정권의 주요 인물이었습니다.
동시에 하나회의 주요 후원자로 하나회와 깊은 연관이 있던 인물입니다. 윤필용은 당시 평양에서 김일성과 비밀 회담을 하고 온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그 후계자는 형님이 되어야 합니다. 김춘추도 당나라에 갔다 와서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고발로 박정희 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박정희는 이를 쿠데타 모의로 보고 발언과 관련 있던 인원들을 조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해당 혐의는 입증하지 못합니다.
대신 업무상 횡령과 뇌물 수수 그리고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과 군무이탈 등 8개의 죄목들을 붙여 투옥시켜 버립니다.
여기에 포함되었던 인물들이 하나회의 주요 후원자 윤필용과 당시 하나회에서 가장 잘 나가던 송영길, 노태우 그리고 전두환의 친구이자 하나회의 비자금 관리담당 이원조 제일은행 차장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윤필용과 손영길을 포함한 관련된 많은 이들은 군복을 벗게 됩니다. 이 과정으로 하나회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당시 육군보안사령관이던 강창성은 군내 사조직의 존재에 분노해 뿌리를 뽑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박정희의 눈 밖에 나 보안사령관에서 3 군관구사령부 사령관으로 좌천되게 됩니다.
1980년대 권력을 잡은 하나회 세력들에 의해 삼청교육대로 보내졌고 이때 얻은 지병으로 고통받다 2006년 별세하였습니다.
10.26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로 인해 10.26 이란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권력의 공백기였던 이때 전두환은 10.26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며 권력의 한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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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쥔 전두환은 정부 각부처로부터 직접 업무보고를 받는 등 월권을 행사했고 전두환의 월권이 지나치다 싶었던 육참총장 정승화는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핵심 멤버들을 전출시키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전두환에게 17계급 강등 수모 당한 정승화 참모총장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아래 클릭 👇🏻
정승화의 계획을 들은 전두환이 한발 더 빠르게 움직였고 그는 보안사 삼인방과 함께 대한민국 현대사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 12.12를 계획합니다.
상관을 목숨 바쳐 지킨 참군인 김오랑 소령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아래 클릭 👇🏻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은 하나회 세력들과 함께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정승화를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최규하의 재가 없이 연행하는 데 성공하고 과정에서 대항하던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등을 무력화시키며 군권을 장악했습니다.
전두환과 끝까지 맞선 장태완 장군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아래 번튼 클릭 👇🏻
12.12는 전두환의 뜻대로 성공하게 됩니다. 정국운영의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전두환이 쥐게 되었으며 이후 하나회는 노태우 정권까지 최고권력자의 자리를 비롯해 군 관련 요직들을 모두 차지하게 됩니다.